중세 서유럽의 봉건사회 형성,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프랑크 왕국의 건국, 크리스트교 문화의 형성과 확산을 정리한다.
프랑크 왕국의 성립
4세기말 훈족의 압박에 게르만족은 로마 영토로 대규모 이동을 하여 서로마 제국 곳곳에 나라를 세웠다.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고 서유럽에 세워진 댑분의 게르만 왕국들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으나 갈리아 지방에 자리 잡은 프랑크 왕국은 오랫동안 번성하였다. 5세기말은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여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었고 8세기 후반 카룰루스 대제 시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그는 로마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카룰루 대제는 학교를 궁정과 수도원에 세우고 학문과 문예를 부흥시켰다. 그가 죽은 뒤 내부 분열을 겪다가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분열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원이다.
봉건제의 성립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서유럽은 바이킹, 마자르족,이슬람 세력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졌다. 기사 계급이 힘을 갖추고 성을 쌓고 무력을 갖추어 성장한다. 자기보다 강한 기사를 주군으로 충성과 봉사를 맹세하여 주준은 그 기사에게 땅을 주어 봉신으로 삼았다. 주군과 봉신의 주종관계는 계약 관계이다. 장원의 형태로 주군에게 받은 봉토를 봉신이 운영한다. 장원의 농민은 대부분 농노이다. 이들은 영주에게 예속되어 마음대로 이사할 수 없었으며 각종 세금을 바쳐야 했다. 노예와 달리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면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다. 봉건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방 세력은 강화되고 왕권은 약화되었다.
크리스트교의 확산
9세기부터 교회는 왕과 본건 제후들의 봉토를 받아 봉신이 되었다. 성직자의 임명권도 그들이 차지하는 일이 많았다. 이로 인해 교회는 세속화되고 성직자가 혼인을 하거나 성직을 매매하는 등 부패한 모습이 나타났다. 11세기 후반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과 황제(하인리히 4세)가 대립했다. 교황은 교회가 성직자 임명권을 가져가 야한 다고 주장하였고 황제는 반발했다. 교황이 황제를 카노사에서 파문한 사건,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고 교황권은 13세기 절정에 이른다.
크리스트교의 중심의 중세 문화
중세 세유럽에서 크리스트교응 유럽 사람들의 정신과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학문의 중심은 신학이었고 스콜라 철학이 유행했다. 12세기 이후에는 유럽각지에 대학이 세워져 교회나 영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중세 고딕양식의 늪이 솟아오른 탑은 천국에 가고자 하는 소망이 담긴 것이고 채색 유리장식은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묘사한 것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이 유명하다. 당시 기사도 문학에는 영국의 <아서왕 이야기>,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