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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윤리학 연구

by 쪼옹드림 2023. 6. 26.

친근한 사람과 낯선 사람, 비대칭적인 것과 대칭적인 것 사이의 사이의 대비와 상관없다. 범인륜적인 규범과 질서가 가능할까? 타자성을 지닌 이웃을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에 빠지는 순간 회생하기 어려운 시기에 가능할 수 있을까? 에 관한 윤리학에 관한 메타-이론적 차원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유토피아적 윤리는 가능한가


극 자본주의 시대로 가면서 한 번의 실수는 전 인생에서 큰 위협이 될 정도로 힘들다. 이 책은 서구 18세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메타-이론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김준환은 말한다. 저자 이글턴은 공감을 기초로 한 상상계적 윤리, 보편법과 추상성을 기초한 상징계적 윤리, 실질적 변화를 가지고 올 실재계의 윤리를 변증법적으로 다루고 다시 사회주의와 유대 기독교 전통의 윤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 유토피아적 윤리의 실현이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책이다. 지금은 KPOP문화가 대세인 시대이다. 꽤 오래됐다. 거의 10년은 되어가고 있다. BTS가 전 세계의 팬덤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행하는 공식적이고 그들의 팬 아미들과의 관계에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볼 때 이미 인종이라는 벽을 넘어 애의 관계로 가는 것을 보았다. 노래란 것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면서 정신을 하나로 이토록 빨리 이끌 수 있다고 하지만 이들이 이뤄낸 하모니는 또 다른 열정적 담합에 있었다고 본다. 나이가 비슷한 남자애의 군집으로 그 나이에 맞는 열정이 유튜브라는 채널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면서 팬덤을 형성했고 이전에 없던 군무를 선사하며 뛰어난 각자의 재량과 동시에 함께 조화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반 대중가요나 팝과 차별되는 예술적인 면모와 그들의 호감 가는 외모 등 다양한 요소들이 버무려진 위력이다. 이 놀라움 흐름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그들로 인해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이미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동방의 예의지국이라는 옛말처럼 우리나라에 깊이 생활화된 유교문화, 이웃의 어른을 자신의 부모처럼 존중하고 나라의 힘든 일에 발 벗고 나서는 민족애 같은 특성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상식이 되는 시대가 올까? 아마 테리이글턴은 그런 유토피아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글은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고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 테리 이글턴은?


1943년 영국 샐포드 출생.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 문학, 문화 비평가이다. 국내 번역 소개된 책은 <비평과 이데올로기>, 열린책들, <문학이론 입문>, 창작과 비평사. 등 다수가 있다.

이 책은 상당히 어렵지만 상당히 흥미롭다. 어렵지만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하면서 발췌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세 범주를 기본으로 하여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상상계의 고집이다. 서론을 잘 읽으면 책을 앞으로 읽어 나가는데 많은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 동시에 전체적인 종합적 견해가 들어 있을 수 있어 대략을 이해하고도 어려우면 본문을 살피면서 반복 적으로 이해해 나가야 한다.

거울단계 The Mirror Stage


거울단계란 어린아이의 발달에서의 한 계기로서 아이가 거울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자신의 움직임과 눈앞에 있는 이미지의 움직임이 마술적으로 상응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시기다. 이 부분을 일고 첫 애 16-8개월 때가 생각났다. 큰 방 안쪽에 있는 화장실은 짧은 드레스룸 라인이 있었는데, 벽면이 거울로 되어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거울을 주시하면서 춤추듯 돌고 자기 얼굴을 손으로 뽐내면서 거울을 보고 웃는 모습을 보았다. 동화책에서 봤던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아름다음에 취해 숲 속 호수에 하염없이 빨려 들어갈 듯했다는 그 장면과 같았다. 엄마가 방에 우연히 들어가 아이를 봤는데도 살짝 보더니 다시 자기 얼굴을 요염하게 보듯이 스스로 만족하며 뽐내는 모습이 신선했다. 약간의 놀라움과 함께. 심취해 있는 모습이 그러했다.  이 거울단계는 현실과 가상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 세계에 대한 유리창인 자아는 실제로 허구이나, 거울 앞의 아이는 비록 자신의 이미지가 환각적이라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 이미지를 실재하는 것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타인이 사회가 나의 상을 oo다라고 명명하면 스스로도 그렇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외면은 내면과 달리 포장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다. 심지어 실제로 유리로 된 거울 속에 미치는 상도 사실은 내가 아니다. 이 초기 부분에서 삶의 결정적인 것들이 모두 세팅된다고 하는 오늘날 심리학적 개념들이 있다. 초기 7세 이전에 환경적 요인 주양육자의 문화적 관습이나 사상, 사회적 배경, 가치관 등이 모두 세팅되어 이후에 스스로 의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본성이 되어 다른 사람의 삶을 살기 힘들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가 힘든 이유로 역발적으로 다시 새롭게 세팅하는 데 습관과 마인드셋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채널은 유튜브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이미 자신이 처한 환경으로 쳇바퀴 도는 삶을 살고 있기에 변화이 순간을 스스로 기획하기도 몹시 힘들므로 그 때문에 강연과 교습을 통한 훈련소도 상당히 많다.

거울단계에서 망상과 기만, 사실 이데올로기적이다.


이 거울단계라 하는 것은 이미지와 관련된 것으로 망상과 기만이라는 의미 또한 포함한다. 아이가 거울 앞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무한한 퇴행 혹은 심연으로 밀어 넣기를 수반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은 설명은 이렇다. "거울 속의 통일적 형태가 아이의 노력에 만족스러운 듯 방긋거리면서 그 아이의 미소를 자아내고, 그 미소는 다시 그 반영된 모습으로부터 기쁨이라는 또 다른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는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기에." _12p. 이는 실제로 거울을 볼 때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아이를 안고 있는 상대인 사람의 경우, 그 표정을 보고 따라 하는 아이를 봐서도 그렇다. 투사하고 반사하는 이 놀이는 감각적 직접성으로 상대의 내부에서 서로 느끼는 듯하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 신경 메커니즘, 아이가 어른의 표정을 모방할 수 있는... 상상계는 타락 이전의 영역인 것이다. 아직 자아나 의식의 중심이 분명하게 형성되지 않은 이 특이한 형태의 심적 공간에는 그 어떤 진정한 타자성이 있을 수 없다. 이 상상계에서는 내가 나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 거울 뒤에 있는지 앞에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멜라닌 클라인은 이러한 특징을 이행성으로 설명하였다. 어린아이가 다른 아이가 넘어질 때 울음을 터뜨리거나 같이 있는 아이를 때리고선 자기가 맞았다고 주장하게 되는 경우 그 경계가 흐려지면서 옮겨가는 현상을 말한다.  즉 공감이라는 원초적 유대를 설명한 것이다. 웃음이 전이되듯, 마치 "느슨한 밧줄 위에 있는 춤꾼의 스릴 있는 몸짓을 보고 관중도 함께 움찔하는 몸짓" 그 자연스러운 똑같은 동작이 18세기 철학자 애덤 스미스가 말한 자발적 흉내 내기이며 라캉의 상상계적 전위의 결과로써 가정한 것 같다고 이글턴은 분석한다. 그는 성인기의 적합한 형태의 상상계는 우정일 것으로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주목했듯이 이글턴은 타자는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서로 합쳐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보다 높은 차원의 거울단계로 재창조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 상상계의 자기 인식은 오인을 낳으며 상징계적 질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상상계의 울타리는 놀이를 통해 그 차이와 타자성 사이의 개방되어 자기 오인의 거울을 돌파하는 상호 주체성의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 상상계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공감을 단순히 감정이나 감각적 느낌으로만 본다면 큰 오해를 낳을 것이다. 각자 살아온 환경과 내적 성향 생각 느낌의 정도 해석능력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느껴지는 그것으로 서로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랬나를 확인하려면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신기루적인 공감적 요소를 갖는 상상계로 인해 우린 서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대화의 중요성


아이가 커가면서 가족 내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빠른 성과가 사회 경쟁 시스템을 여전히 그 시간이 더 짧아지고 있다. 토론이나 글쓰기 수행평가등으로 교체되고 있더라도 여전히 성과위주이기에 가족과 사적인 얘기를 할 시간을 다시 빼앗은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늘 과정을 중시한다고 하나 여전시 이미 성과를 위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올바른 대화의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부모 또한 함께 성장해야 한다. 사회는 고도로 성장하고 아이들도 바쁘게 정신을 다독인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기 쳇바퀴에 빠져 돈을 버느라 바쁘다. 그 정신의 갭으로 서로 존중하는 대화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다시 본질로... 존중, 존엄...
그런데 과격해진 감정으로 대화다운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급하더라도 서서히 노력해 보자.